나의 이야기

외할머님의 소천

에드워드 동 2011. 8. 4. 17:24

 

아침에 일어나 휴대전화를 보니 부재중 전화 2통과 문자 1개가 와 있었다. 문자 메시지 내용을 보니 '할머니 소천하셨어'라는 글귀가 보였다. 그런데 휴대전화가 모르는 번호였다.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아! 외할머님께서 세상을 뜨신 모양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서둘러서 출근 준비를 마치고 의정부로 가는 중인데 금오동 성모병원 앞 길에서 전화가 왔다. 아까 그 휴대전화였다. 그래서 나는 모르는 번호이고, 운전 중이라서 안받을까 하다가 받았다. 그런데 아주 낮익은 목소리였다. 전화기 저편에서 아까 전화와 문자를 보냈는데 못봤어? 라고 들려왔다. 그는 외사촌형이었다. '아! 형이야, 나는 '형 전화면 이름이 뜨는데 모르는 전화라서... 의정부 주차장에 도착해서 전화를 해보려는 참이었는데' 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형이 나 전화번호가 최근 바뀌었어, 그리고  '할머니께서 오늘 새벽에 1시 30분에 소천하셨어' 라고 말했다. 나는 '형! 요즘 조금 바빠서 그러는데 발인날에 갈께' 라고 대답했다. 외사촌형은 '그럼 바쁜일 끝내고 그렇게 해' 라고 말했다. 나는 얼마 후 사무실에 와서 10시 30분경에 우리 형한테 전화를 했다. 얼마 후 형이 나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발인날은 그렇고 전날에 가 상가에서 밤을 새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잠정적으로 내일 저녁 9시에 의정부 주차장에서 만나서 같이 가기로 했다.

 

우리 외할머님은 99년 7개월을 사신 것이다. 몇 달만 더 사시면 100세다. 사람들은 다 백수를 넘기실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셔서 모두들 황망해 했다. 외할머님은 병원에 3년 정도 입원을 하고 계셨으며, 최근까지도 정정하셨는데 말이다. 우리 외할머님께서 너무 오래 사셨다고는 하지만 세상을 뜨셔서 많이 슬프다. 사람은 장수를 하거나 단명으로 세상을 뜨거나 일단 누구에게 있어서나 '죽음'이라는 것은 아주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외할머님께서는 우리 엄마와 큰외삼촌 두 분을 앞서 보내시고 쓸쓸하게 사셨다. 우리 엄마는 큰딸이기도 하지만 살아 생전에 외할머님께 참 잘 하셨다. 그래서 외할머님께서 우리 4형제가 외손자임에도 친손자 만큼이나 아주 잘 해주셨다. 특히 엄마가 80년대 초반부터 아프셨는데 우리 집에 오셔서 엄마 병간호를 하시는라고 한동안 계셨다. 그래서 우리들은 외할머님과 더욱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된 것이다. 와할머님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86년 6월 세상을 뜨셨다. 이어 큰외삼촌까지 돌아가셔서 외할머님은 커다란 슬픔에 잠기셨다. 큰아들과 큰딸을 당신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셨으니 얼마나 큰 슬픔에 빠지셨겠는가? 그 심정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나 역시 엄마가 돌아가셔서 한동안 참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슬픔에 빠졌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우리 집은 남자만 넷이라서 내가 여자 역할을 많이 해야만 했다.엄마가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하시거나 하면 그 빈 공간을 채워나가야 했다. 밥하고 빨래도 하는 일상적인 주부 역할을 말이다. 

 

외할머님은 큰딸과 큰아들이 하늘나라로 먼저 가신 것에 대해 마음 아퍼 하셨다. 항상 내가 먼저 죽어야 되는데 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외사촌형이 외할머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어떤 문제가 발생해 작은 아들 집으로 가셔서 거기서 쭉 계시다가 3년전 위독하셔서 중환자실로 입원하셨다. 그런데 점차 회복이 되셔서 건강해 지셨다. 다시 검은 머리가 나시고 해서 모두들 백세는 사실 것이라고들 말했다.

 

나는 멀리 살아서 외할머님께서 입원해 계시는 병원을 자주 찾아 뵙지는 못했다. 명절 때 청주에 내려갔다가 한 번씩 들리는 정도였다. 그런데 외할머님은 2년 전부터는 외손자가 누구인지도 잘 몰라 보셨다. 물론 연세가 많으시니까 과거 커다란 줄기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막히는 곳도 있으셨는가 보다. 그래도 그렇지 외손자인 우리를 몰라 보시다니 처음에는 그게 많이 속이 상했다. 외할머님은 큰 딸의 외손자가 있는 것은 아셨지만 정작 우리들이 그 외손자라는 사실은 모르셨다. 외할머님과 아주 친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외할머님을 찾아가서 '저희들은 외할머님 큰딸의 아들들'이예요. '외할머니! 외손자 넷있는거는 아시죠". 그러면 "그건 아는데 누가 형인지 동생인지를 잘 모르겠다' 라고 말씀을 하셨었다. 작년 가을 10월에도 형과 함께 찾아 뵈었는데 잘  모르시는 것 같았다. 그때도 외할머님은 연신 엄마에 대한 얘기만 하셨다.

 

그리고 12월 초겨울에 대학동창들 연말 모임 때문에 청주에 갔다가 외할머님이 좋아 하시는 뻥티기 쌀티밥과 보리티밥 2종류와 음료수를 사갔다. 같이 계시는 환자분과 간병인께 음료수 하나씩 드렸다. 주변분들은 '외할머님께서 백수는 사실것'이라고 얘기를 해주셨다. 외할머님은 문병을 온 사람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시면서 연신 어머니 얘기만 하셨다. 저번에 뵈었을 때보다 더 좋아지신 것 같아 다행스럽게 생각했지만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셔서 안타까웠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기억이 하나씩 사라지곤 하는데 나중에 나도 우리 자녀들을 몰라보면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에 이르니 마음이 착잡했다. 그래서  다소 위축돼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외할머님께 건강하시라고 얘기를 해드렸다. 그리고 다음에 또 찾아 뵙겠다고 인사를 드리고 병원을 나왔었다.

 

외할머님은 외손자도 못 알아보시고, 그러시더니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제 나는 엄마 그리고 외할머님 을 잃어서 외가에 대한 커다란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더 슬프다. 아직 외삼촌 세분과 이모님이 계시지만 말이다.

 

발인 전날 의정부에서 형과 셋째 동생과  함께 만나서 21시에 출발했다. 밤 늦게 출발을 했지만 휴가철이라서 그런지 교통량이 많았다. 비도 많이 내리고 해서 음성휴게소에 내려서 음료수 한 병씩 사서 마시고 출발했다. 증평 톨게이트로 빠져나와 국도로 갈아타고 달려서 청주병원에 23시 30분경에 도착했다. 병원 장례식장에는 낮익은 친척들의 얼굴들로 가득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외할머님께서 소천하신 자리라 자못 숙연한 분위기였다. 조문은 셋째와 넷째 외삼촌이 받으셨다.

 

장례식장인데도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외할머님께서 백수를 하셔서 그런지 곡들을 하지 않았다. 호상이라고들 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또 외할머님 가족들 가운데 목사도 2명이나 있고, 외삼촌들도 교회 집사이고 해서 믿음을 가진 기독교식 장례절차를 진행하는 중이라서 더욱 그랬다. 

 

형과 나 그리고 동생은 조문을 마친 뒤 준비된 밥을 먹었다. 잠시 후 넷쨰 동생이 근무를 마치고 왔다. 우리들은 이모님, 외삼촌, 외사촌 형, 외사촌 동생들과 함께 밤이 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셋째 외삼촌은 지난날 우리 엄마 살아 생전에 있었던 추억들을 하나 하나씩 풀어서 내셨다. 마치 장독에서 잘 익은 김치 한 포기를 꺼내오듯 얘기를 들려 주셨다. 셋째 외삼촌은 '어머님이 소천하셔서 많이 슬프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남들은 백수에 가깝게 사셔서 호상이라고들 하지만 자식된 입장에서 부모님과 영원한 이별은 그래도 슬프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엄마 이야기를 계속하셨다. 그리고 '오늘은 술을 좀 마셔야 할 듯하다'라고 이야기를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연신 술을 권하셨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은 맥주를 꽤 많이 마셨다.

 

나는 밤새 한 잠도 못잤더니 조금 피곤했다. 아침 7시경 형과 함께 무심천 옆 용화사가 있는 곳으로 바람을 씌러 산책을 나갔다. 그런데 무심천 자락 작은 다리를 건너가는 중에 외사촌 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곧 장례식이 거행될 예정이니 빨리 돌아오라고 했다. 그래서 용화사 바로 앞까지 갔다가 가던 길을 되돌려서 병원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께서 우리가 나간 사이에 오신 모양이다. 인사를 드리고 나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8시 30분 교회에서 목사님과 성도들이 와서 장례식 예배가 시작됐다. 예배를 보는 곳은 병원 장례식장 상가 안이라서 모두 다 들어가기 어려웠다. 그래서 조문객 2/3는 밖에서 장례예배 절차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 예배가 끝나고 캐딜락 장의 영구차로 외할머님 시신을 옮겼다. 우리들은 장례버스를 타고 장지로 향했다.

 

장지는 목련공원묘지인데 병원을 떠난지 채 20분이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작은 산자락인데 조금 경사가 급한 언덕배기였다. 어제는 비가 많이 내려 조금 걱정을 했었는데 오늘은 다행히 비가 오지는 않았으나 대신에 무척 무더웠다. 외할머님 묘소자리에 가보니 이미 공원묘 직원들이 광중을 다 파 놓았었다. 흙 색깔이 약간 어두웠으나 돌은 없고 마사토 비슷한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잠시 후 하관예배가 시작되었다. 예배가 끝나고 외할머님의 관은 광중 속으로 내려졌고, 이어 취토를 가족분들이 한 명씩 해 나갔다. 나도 형에 이어 한 삽을 크게 떠서 취토를 하면서 '할머님 부디 좋은 곧으로 가셔요' 라고 기원을 드렸다. 동생들도 취토를 하면서 '할머님! 좋은 곳으로 가셔요'라고 외쳤다.  잠시 후 취토가 끝나고 직원들이 홍대를 내려 고정시키고 본격적으로 봉분작업을 시작했다. '봉분은 삼우제까지 완성을 할테니 먼저들 내려 가시라'는 공원묘지 장례요원의 말에 따라 우리들은 산에서 내려왔다.

 

외할머님께서 영면에 들어가실 묘 자리는 산 자락 중간으로 전면 시아가 좋았다. 앞 산 정상 봉우리로 쭉 뻗어나가는 산세가 좋아 보였다. 우리들은 버스를 타고 산을 내려오다가 묵 전문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모님이 우리들이 탄 장례버스에 오셔서 꼭 집에 들렸다 가라고 하셨다. 우리는 병원에 차가 있어서 다시 청주로 왔다. 병원에서 외삼촌 그리고 외사촌 형제들과 이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먼저 출발하시고  나서 우리 형제 넷은 이모님댁으로 출발했다. 차는 도청을 지나 상당산성을 거쳐 꾸불꾸불한 산길을 따라서 달렸다. 주변 풍광이 정말 좋았다. 드리이브 코스로는 제격인듯 했다. 얼마 후 우리는 미원을 거쳐 이모님댁에 다다렀다. 고개를 넘어 골목으로 들어 갔는데 차가 빠져 나갈 폭이 못되어서 후진해서 반대로 다시 나왔다. 다시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앞선 차량 한 대가 골목으로 막 들어가고 있었는데 그것이 이모님이 타신 외사촌 동생의 차였다. 

 

우리는 이모님댁에 들어갔다. 방안은 에어컨과 선풍기를 틀어서 그런지 정말 시원했다. 이모님이 직접 농사를 지으신 옥수수를 삶어 주셔서 맛나게 먹었다. 그리고 외사촌 동생이 밭에서 따온 참외도 맛이 있었다. 밤을 새워서 그런지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또 배가 부르니 모두 한 잠을 자기로 해서 눈을 붙였다. 한 시간 반 정도를 잔 것 같았다. 한결 들 피곤한 것 같았다. 이모님이 저녁을 먹고가라고 하셨지만 서울을 거쳐 우리집에 오려면 너무 늦으니 지금 출발을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이모님이 옥수수 2자루와 감자 2박스를 주셨다. 그래서 잘 먹겠다고 인사를 드리고 출발을 했다.

 

청주 넷째 동생은 직장 이직 관계로 오창 근처 장모님댁에서 임시로 거처하고 있다. 그래서 동생을 그 집 앞까지 태워 주었다. 나는 옥수수 한 자루와 감자 한 박스를 내려 주고, 중부 오창톨게이트를 거쳐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고속도로는 조금 막혔으며 교통량이 제법 많았다. 이천휴게소에 들려 음료수와 호도과자를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형과 셋째 동생을 도봉산역 앞에 내려 주고 집으로 왔다.

 

외할머님의 소천으로 다시 찾아뵙지 못하게 돼 슬프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 보듯 외할머님을 찾아뵙곤 했는데 이제 다시는 못뵙는다고 생각하니 많이 슬프다. 그렇지만 외할머님은 아주 좋은데로 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도 그렇지만 외할머님 역시 심성이 너무 고우신 분이었다. 나는 두 분 모두 살아 생전에 착하고 곱게 사셨던 분이었기 때문에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비록 눈으로 뵙지는 못하게 돼 아쉬움은 크지만 나는 영원한 이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왔다가 또 그렇게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는 일이니 자연스럽게 수용을 해야 하겠다. 그게 세상 삶의 원칙이자 진리가 아니던가? 슬픔에서 벗어나 또 힘차게 일어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겠다.

 

외할머님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간구합니다.

어쩌면 외할머님은 하늘에 가셔서 우리 엄마와 만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외할머님 그리고 엄마 그동안 못다 하셨던 수많은 얘기를 나누시며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라옵니다.

 

외할머님!

부디 하늘나라에서 고통도 없고 평안한 영면을 하시길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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